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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초 배우기

EBS 다큐프라임 : 앙트레프레너, 경제강국의 비밀 1부 - 창조적 파괴자들

by 경제와의동침 202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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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경제를 배운다고 표현하는 것보다 익힌다 또는 감을 읽다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말하고 싶다. 가랑비 젖듯 나의 옷은 조금씩 젖어들듯, 경제생활에 조금씩 접근하여 그 감을 읽고 싶다고 생각하시면 이 영상을 끝까지, 여러 번 시청하시길 바란다. 결코 그 노력이 나의 경제생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YwrJF8lMrs&list=PL2cXnoEDdx5J2jM_9w2aePKbBh1P8TpFa&index=1 

 

 이 영상이 말하는 것은

- 어째서 어떤 나라들은 성장하고, 어떤 나라들은 성장하지 않는가.

- 부유한 나라는 어떻게 부유해지는가
- 가난한 나라는 왜 여전히 가난한가?

- 우리는 자본과 노동, 기계를 보유하고, 대형공장을 건설하며 성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형공장을 건설하고도 성장하지 못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한 나라의 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리고 경제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빵을 부풀어 오르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경제 성장을 만드는 것은 밀가루나 설탕이 아닌 효묘입니다.

그게 바로 아트레프레너입니다.

앙트레프레너는 혁신을 통해 성장을 이끈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

아트레프레너는 혁신을 창조하고 기존 질서를 파괴하죠

 

앙트레프레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꿉니다. (래리 슈웨이커트)

앙트레프레너는 세상을 부유하게 만듭니다.

 

인류역사에 결정적 순간에는 앙트레프레너가 있었다. 그들은 혁신을 통해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패너다임을 만들어 냈다.

창조적 파괴자들, 앙트레 프레너가 많은 시대에는 부유해졌고, 경제 강국이 됐다.

 

Entrepreneurs는 혁신을 통해 창조적 파괴에 이른다. (조셉 슘페터(1883 ~ 1950))

금융위기, 저성장, 그리고 실업, 끝이 없이 이 불황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1929년 순항하던 미국 경제에 문제가 생겼다. 미국 대공황이 강타한 것이다. 주식시장은 폭락했고, 수천 개의 은행은 파산했다. 도산한 기업체만 8만 개가 넘었다. 실업자가 1933년에만 1500만 명에 달했다.  전체 근로자의 25%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불황은 왜 생기는가? 자본주의의 위기는 극복할 수 없는가? 세계적인 불황에 대해 슘페터의 고민이 시작됐다. 칼 마르크스는 불황은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한계다. 이러한 모순으로 자본주의의 붕괴는 필연적이다. 이런 우려와는 달리, 자본주의는 대중의 삶을 크게 향상했다. 반면, 고전학 경제학자들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생산과 소비를 자연스럽게 조정한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손은 나타나지 않았고, 불황이 찾아왔다. 이 불황은 어디서 온 것일까? 당시 이 불황은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렸다.

 

김두얼(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대공황은 자본주의 경제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대공황이 왜 발생했고,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는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슘페터는 그중에 한 명이었고, 그는 혁신을 강조했습니다. 슘페너는 자본주의에서 불황과 위기는 불가피하고, 불황은 혁신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결론은 혁신이었다. 슘페터는 혁식이야 말록 불황을 넘어 호황으로 가는 결정적 계기라고 봤다. 자본주의에서 불황과 호황이 번갈아 나타나면서 성장한다고 한다. 슘페터는 엘리자베스에게 더 많은 스타킹을 신게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에게도 스타킹을 신게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했다. 그것이 바로 혁신이라고 했다. 슘페터는 혁신을 통해 경제가 발전하고, 대중의 생활도 나아진다고 했다. 

 

조엘 모키어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제학과 교수)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국가의 부를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혁신이 아라고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이전에 생산했던 동일한 재화와 용역을 보다 저렴하게,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부가 늘어나는 겁니다. 

슘페터의 혁신은 양적 성장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마차를 튼튼히 만들고, 더 많은 말을 투입하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혁신은 마차대신 기차를 만드는 것이다. 마차와는 전혀 다른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다.

 

래리 슈웨이커트 (미국 데이턴대 역사학과 교수) 마차산업은 자동차산업이 성장하면서 쇠퇴합니다. 기존에 마차를 만들던 사람들은 다른 일을 찾게 되죠. 더 이상은 마차를 만들지 않죠. 왜냐하면 아무도 더 이상 마차를 타려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모든 산업은 언제가 이런 시기에 이르게 됩니다.

 

 

혁신은 파괴를 동반한다. 기존 지식과 기술이 쓸모없어지는 것 대신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창조적 파괴라고 한다.

혁신에 성공한 기업들이 나타나고, 혁신에 실패한 기업들이 사라지면서 불황은 극복된다. 

 

래리 슈웨이커트 (미국 데이턴대 역사학과 교수) 레코드 산업의 유행이 끝나자 카세트테이프로 교체되었고, 그 산업의 유행이 끝나자 CD로 대체되었으며, 그 유행이 끝나자 이제는 디지털 음악으로 대체되는 현상을 보였죠. 그게 바로 창조적 파괴이다.

 

리처드 실라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 교수) :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타나서 철도가 운하를 대체하고, 석유가 고래기름을 대체하고, 전기가 새로운 동력이 된다. 기존의 산업은 쇠퇴하고 새로운 산업이 생겨납니다. 이 과정에서 세상은 더욱 부유해진다.

 

전구는 창조적 파괴의 좋은 사례다. 전기의 등장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리고 인류의 삶은 완전히 바꿔버렸다. 밤에 문을 여는 식당과 극장이 생겼다. 야간 근무를 하는 근로자들도 점점 많아졌다. 전구의 등장으로 새로운 도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대신 기존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은 파괴됐다. 

 

필립 아기온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 혁신에 의한 성장은 대부분이 창조적 파괴이다. 새로운 것이 개발되면 이전 것들이 쓸모없어지는 거죠. 새로운 것이 과거의 것보다 낫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마찰이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이런 정치경제학이 자리 잡고 있다.

 

조엘 모키어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제학과 교수) 우리가 부유하니까 전에 아무도 꿈꾸지 못했던 것들을 사기 시작한다. 오늘날에도 그냥 수의사가 아니라 정신과 수의사도 있다. 생각하면 개의 머리를 검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백 년 전에 누군가에게서 당신 손자가 사이버 보안 전문가가 될 거라고 들었다면 무슨 소린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을 거다. 지금으로부터 50년 후에 당신과 제가 상상도 못 하는 직업이 생길 겁니다. 그게 기술 변화의 본질이다. 완전히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낸다.

 

전구를 발명한 사람은 토마스 에디슨이다. 에디슨은 단순 발명가가 아니라 세계 최초로 전기 회사를 만든 기업가이다. 그의 회사는 1900년 월스트리트가 선정한 미국 12대 초우량 기업 중 현재까지 살아남은 기업 GE이다. 에디슨처럼 발명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혁신을 통해 이율을 창출하는 사람을 앙트레프레너라고 한다. 앙트레프래너는 단순히 기업을 소유하거나 경영하는 사람, 혹은 발명하는 사람과는 다른 개념이다. 앙트레프레너는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창조적 파괴자들이다.

 

졸탄 액스 (영국 런던정경대학 교수) 앙트레프레너들은 변화를 창조합니다. 변화는 뭔가를 파괴한다. 앙트레프레너가 하는 또 다른 일은 부유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새로운 부유층이 기존의 부유층에 도전해 뒤집어엎습니다. 혁신을 통해 창조적 파괴를 이루는 사람들. 앙트레프레너는 성공하려고 하는 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공뿐만 아니라, 성공 자체에 의미를 둔다. 

 

세상에 눈에 띄는 변화를 가져왔다는 성취가 입니다. 앙트레프레너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완성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앙트레프레너는 경쟁에서 이기려고 하는 강한 사람들이다. 앙트레프레너들이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적 이윤이다. 혁신으로 얻은 막대한 이윤이야말로 앙트레프레너가 위험을 피하기 않고 모험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마크 카슨(영국 레딩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수익 기회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경향이 있다. 수익 기회가 없다면 혁신은 이우어지지 않는다. 

 

앙트레프레너에게 혁신이란 무엇인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다. 혁신은 기존에 사용하지 않았던 새로운 생산방식을 도입하는 것이다. 혁신이란 누구도 진입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다. 앙트레프레너의 혁신이란 새로운 원자재를 개발하고 공급하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앙트레프레너는 기존의 독점망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산업구조를 만들면서 혁신한다.

 

필립 아기온(미국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혁신은 새로운 생산과정을 개발하거나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것 또는 새로운 것을 조직화하는 것일 수 있다. 제품과 서비스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제품을 개발할 수도 있다. 또한 혁신은 기존의 기술을 새로운 환경에 적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이 혁신이다.

 

존 스틸고든(작가) 앙트레프레너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희망을 넓혀갑니다. 그것이 그들을 부자로 만들고, 세상을 부유하게 만들다.

 

https://www.youtube.com/watch?v=BSSTlLQWj90&list=PL2cXnoEDdx5J2jM_9w2aePKbBh1P8TpFa&index=2 

 

한 사회가 발전하고 쇠퇴하는 것이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앙트레프래너가 출현할 때 그 사회는 발전한다. 앙트레프레너가 쇠퇴하면 그 사회도 쇠퇴한다. 경제 패권도 마찬가지이다. 1만 년 전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던 인류는 한 곳에 정착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전과 다른 생활 방식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혁신이었다. 처음 야생식물의 씨를 뿌리고, 야생동물을 사육했던 인류의 조상은 에디슨을 능가하는 앙트레프레너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농업 사회는 경제 발전 속도가 매우 느렸다. 

 

왜 농업사회의 성장은 더딜 수밖에 없었을까?

에릭 라이너트 (에스토니아 탈린공과대학교 교수) 농업 광산업 어업의 경우는 자연에 의해서 생산량이 제한되는데, 토양의 질 같은 것을 말한다. 비옥한 토양을 가지고 있더라고 밀이나 당근을 잘 재배할 수 있겠지만, 언제 가는 비옥하지 않는 땅에서 재배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농업사회의 수확체감 법치에 따라, 수확량은 노동력에 따라 비례적으로 증가하지는 않는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농업사회에서도 혁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쟁기의 사용, 사료 작물의 사용, 제초제의 발전등으로 생산이 늘었다. 농업은 근본적으로 자연의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투자한 만큼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이런 이유는 농업사회에서는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1453년 세계사의 지형을 바꾼 사건이 발생했다. 1000년 동안 기독교의 중심 역할을 해온 비잔티움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제국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함락된 것이다. 오스만 튀르크의 최신 대포가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렸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한마디로 말하면 군사적, 기술적으로 아시아가 유럽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준 대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 유럽은 대항해에 나서게 되고, 그 결과로 궁극적으로 아시아를 추월하게 된다. 역사는 승자가 패자가 되고, 패자가 승자가 되는 연속임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동서양을 잇는 무역의 중심이었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오는 향신료와 직물등, 아시아의 진기한 상품들을 유럽에 판매하면서 많은 이윤을 남겼다. 근데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동서 무역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유럽은 이미 동양의 수입품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유럽은 동방무역의 통로가 막히자 수입품의 가격이 더 오를까 걱정을 하게 됐고, 아예 아시아와 직접 거래를 하면 더 많은 이득을 스스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시아로 가는 바닷길 확보에 가장 빨리 움직인 곳은 유럽의 변방 이베리아 반도였다. 포르투갈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확보했다. 그런데 대서양을 건너 아시아로 가려는 이가 있었다. 스페인이 지원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다. 

 

콘수엘로 바렐라 (스페인 서반아메리카연구대학 교수) 15세기 중반 과학자들은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인들은 항상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했고, 영국인들은 북쪽 바다를 통해 교역했다. 아무도 미지의 바다를 여행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리처드 실라 (미국 뉴욕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 콜럼버스는 신세계를 찾아 나섰다. 사실 그는 아시아로 가는 지금 길을 찾았다. 지구가 둥그니까 서쪽으로 항해해서 동쪽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중국에 도착할 것이라고....

 

콜럼버스는 남들이 가지 않는 새로운 항해를 개척하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자료를 수집했다. 스페인 세비야 성당엔 그의 손 때 묻은 책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마고 문디'엔 천 건에 가까운 수많은 메모가 남겨져 있다. 지구 크기는 우주 전체에 비하면 점 하나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 는 항행 거리가 짧다는 것이다. 그만큼 콜럼버스는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걸 받아들였을 것이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수많은 주석을 남겨 놓았다.

 

동방견문록 귀퉁이에 관심사들을 적어둔 것이다. 진주가 등장하는 부분에는 진주라고 적소, 진주가 발견되는 위치를 적어놓기도 했다. 콜럼버스의 항해 동기는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1492년,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지나 아시아로 가는 길에 위치한 아메리카에 도착한다. 아메리카는 유럽인들에게 신대륙이었다. 콜럼버스는 새로운 교역로와 새로운 시장을 확보한 것이다.

존 스틸 고든 (작가) 콜럼버스는 유럽 확장의 엄청난 길을 열었다. 몇백 년 만에 세상을 완전히 바꿔 놓은 것이다.

 

포르투갈에 의해 아프리카로 지난 아시아로 가는 무역로가 열리고, 스페인에 의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가는 무역로가 개척됐다. 대항해의 시작의 개막이었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대항해 시대를 연 탐험가들은 오늘날로 보자면 벤처기업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새 항로의 개척이 큰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고, 구체적인 사업 계획을 짰으며, 이 계획을 가지고 유럽의 여러 궁정들을 돌며 사업 설명회를 개척했다. 거기에서 후원자를 찾게 되면 이들은 위험과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사업을 실행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사람들은 도전정신이 넘치는 앙트레프레너라고 할 수 있다.

 

대항해시대의 최대 주역은 무역로를 개척했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아닌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장거리 무역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고 위험을 나누기 위해서 일반인들의 투자를 받았다. 유한책임주식회사 동인도 회사를 만든 것이다. 

 

헹크 덴 하이어 (네덜란드 레이덴대하교 역사학과 교수) (주주) 투자자들은 회사에서 생긴 문제에는 책임이 없고, 회사에 투자한 돈만 잃을 뿐이다. 그걸 우리는 유한책임이라고 부른다. 

 

클레이 레스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교 경제사학과 교수) 동인도회사는 최초로 설립된 유한책임회사였고, 오늘날 유한책임주식회사의 모델이 됐다. 동인도 회사는 항해가 끝난 후에도 이득을 배당하지 않고, 다음 항해에 재투자했다. 대신 원하는 경우 주식을 거래하게 했다.

 

헹크 덴 하이어 (네덜란드 레이덴대하교 역사학과 교수) 동인도회사가 현대적이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회사 주식을 남들에게 팔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17세기 초에 주식시장이 암스테르담 동인도회사로부터 시작됐고,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미국 월스트리트, 프랑크푸르트, 프랑스, 런던으로요.

주식을 거래할 수 있다는 얘기는 상당히 주요하다. 투자자가 자금을 회수해도 다른 투자자가 대신 들어와 그 회사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장용성(연세대 상경대학 경제학부 교수)  장거리 해상무역에는 큰 위험이 따르고 많은 자본이 필요합니다.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통해서 막대한 자본을 모으고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큰 이윤을 창출했습니다. 그래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만든 이들을 앙트레프레너라고 부릅니다. 

 

당시 유럽에서 아시아로 항해하는 선박의 절반이상이 네덜란드 선박일 정도로 네덜란드는 부유했다. 그렇게 네덜란드는 장거리 무역에 성공했고, 경제 강국이 됐다.

 

클레이 레스허(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교 경제사학과 교수)  자본주의의 역사 전체를 볼 때 암스테르담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특히 상인들에 의한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산업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18세기의 영국을 말합니다. 아마도 네덜란드 황금기는 상인 자본주의 정점이자 최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항해시대, 전 세계가가 무역로 연결되면서 누가 얼마나 많은 자원을 가졌느냐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원자재는 무역을 통해서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원하는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한 나라의 부를 결정하게 됐다. 원래 영국은 모직물이 발전한 나라였다. 그런데 인도에서 값싸고 질 좋은 캘리코 면직물을 수입하면서 영국의 모직물 산업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캘리코 면직물 수입을 금지한 거에 이어 착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거에 이르게 되었다. 국내 모직물 산업을 보호하는 조치였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산업혁명 초기에 영국은 아주 독특한 경험을 합니다. 영국 정부는 자국의 모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인도산 캘리코 면의 수입을 금지한다. 결과는 오히려 영국 모직물 산업은 쇠퇴하게 되고, 면직물 산업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 면직물 산업이 산업혁명 시대의 주역으로 작동하게 된다. 

 

김두얼(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산업혁명이 왜 영국에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설명이 있지만, 어느 하나가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이고, 그것이 근대적 경제성장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근대적인 앙트레프레너들의 등장이었다. 

 

수입규제에도 불구하고, 면직물을 찾는 수요는 꾸준히 늘었다. 그러자, 규제를 피해서 면허가 수입되었고, 소규모 생산업자를 통해 소규모 면직물이 생산됐다. 면직물의 수요가 늘어나자, 기존의 방법으론 감당이 안되자, 방적기와 방직기들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더 좋은 기술이 필요했고, 더 많은 돈이 기술 혁신에 투자된 것이다. 볼턴과 와트가 개발한 증기기관이 대표적인 것이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증기기관의 사용은 인간의 에너지 사용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동안 인간은 인력, 축력, 풍력, 수력과 같은 현존하는 에너지원에 의존했다. 증기기관은 수억 년 또는 수십억 년 동안 묻혀 있었던 석탄이라는 화석 연료를 씀으로써 인간이 새로운 에너지원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증기기관의 개발로 면직물 생산량은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증기기관은 면직물 공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상품들은 철도와 선박을 실려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렇게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 됐다.

 

마크 카슨 (영국 레딩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많은 이들은 산업혁명은 앙트레프레너십에서 비록 됐다고 한다. 저는 그 연결이 완벽한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증기력은 금속 생산의 더 나은 방버브로 이어졌고, 그것이 철도를 통한 고속 주행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영국의 앙트레프레너들은 증기의 잠재력을 현실로 구현한 것이다. 저는 영국 산업혁명이 세계 역사의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QGK2VCIS0Hw&list=PL2cXnoEDdx5J2jM_9w2aePKbBh1P8TpFa&index=3 

 

증기기관이 혁신으로 시작된 산업혁명은 영국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영국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자였던 네덜란드에 1인당 국내총생산량을 앞지르면서 강국의 지위를 확보했다. 현재 인류가 가진 부의 97%가 만들어진 것도 바로 산업혁명 이후이다.  수천 년 동안 농업사회에서 만들어지고 쌓인 부를 산업사회가 단숨에 따라잡은 것이다.  

 

 

김두얼(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산업혁명은 기술혁신으로 빠른 경제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혁신을 주도했던 것은 근대적 앙트레프레너였다. 

 

존 스틸고든(작가) 현대의 역동적 경제에서 앙트레프레너십 없이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혁신과 혁신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가? 앙트레프레너 혁신은 또 다른 혁신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새로운 혁신을 유도하기도 한다. 

 

슘페터가 전형적인 앙트레프레너라고 극찬했던 헨리 베서머는 효과적인 제강법을 개발한 인물이다. 베서머이전에 제강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생산량이 제한적이어서 칼이나 연장 등에만 사용했다. 그런데 베서머가 새로운 제강법을 개발한 것이다.  

 

존 스틸고든(작가) 산소 바람을 가해서 철의 불순물을 다 태워버리고 알맞은 양의 탄소를 첨가해서 30초 만에 철강을 제조하는 공정을 알아낸 것이다. 그러자 철강가격이 폭락했다. 베서머전로는 기존 제강로의 100배인 20톤까지 한 번에 작업할 수 있었다. 선철 5톤을 가공하는데 하루정도 걸리던 시간을 10분으로 단축시켰다. 톤당 40파운드 하던 강철가격을 6~7파운드로 떨어뜨렸다. 새로운 제강법을 개발한 베서머는 철강산업에도 뛰어들었다. 

 

김두얼(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베서머가 강철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베서머는 강철이 대량 생산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강철의 가격을 크게 낮췄으며 그로 인해 혁신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미국에서 철강산업이 발전한 것은 앤드류 카네기에 의해서였다. 카네기는 영국 이민 2세로 당시 강철이 산업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간파했다.

 

김두얼(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카네기는 원래 철도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강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철강 산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비용절감을 고민하던 카네기는 베서머전로를 접하고, 바로 자신의 철강 회사에 바로 설치했다. 베서머제강법을 도입하면서, 미국의 철강산업도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존 스틸고든(작가) 1860년대 미국은 모든 철강을 대영제국에서 수입을 했다. 1900년대쯤에는 카네기 철강회사에서만 영국과 독일 철강산업을 합친 것보다 많은 철강을 제조했다. 그리고 이들 두 나라로 철강을 수출하기까지 했다.

 

철강가격은 떨어지고 품질은 좋아졌다. 대량생산된 강철은 건물 뼈대에 사용됐고, 도시의 마천루는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존 스틸고든(작가) 40년간 이 도시에서 맨해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트리니티 교회였다. 1870년대 뉴욕 스카리라인을 보면 교회 첨탑들이 보였다. 다른 것들은 다 5층짜리 들이었다. 철강으로 10층, 15층, 20층, 100층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강철로 시작된 혁신은 다른 곳으로 퍼져나갔다. 교량과 철도, 자전거와 크레인도 강철이 사용됐고, 자동차산업에도 혁신이 일어났다. 자동차를 둘러싼 산업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시작됐지만, 본격적으로 일어난 곳은 미국이었다. 

 

김두얼(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헨리 포드 이전의 자동차는 주문에 의해 하나하나 손으로 만드는 수공업품에 가까웠다. 그로 인해 자동차의 가격은 매우 비쌌고, 부자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일종의 사치품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헨리 포드 "우리는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겠습니다."  포드가 값싼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대중화를 위한 포드의 선택은 대량 생산이었다. 모든 공장에 컨베이어벨트가 설치됐다. 

 

하먼 슈워츠 (미국 버지니아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소의 각 부위를 분해하는 과정을 보고, 포드는 그것을 역으로 하는 조힙라인을 만든 것이다. 작업자들이 체인 사이를 이동하는 것을 보고, 그 과정을 역으로 컨베이어 벨트로 자동차를 옮기면서 부품을 조립하게 한 것이다.

 

포드의 공장에선 제품이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움직이고 작업자는 제자리에서 맡은 일을 반복적으로 수행했다. 

 

하먼 슈워츠 (미국 버지니아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포드의 아이디어는 자동차를 규격화하는 것이었다. 부품공급업자들에게서 공급받는 각 부품을 동일한 크기로 통제했다. 그리고 각 부품을 작업자들에게서 공급해서 자동차가 조립라인을 따라 작업자에게 오도록 했다. 정밀도가 높았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포드의 기업가적인 통찰력은 부품을 작업자에게 직접 공급하고 조립라인을 통해 자동차를 작업자에게 이동시켰으며 규격화된 부품이 적시 적량으로 공급되게 한 것이다. 

 

컨베이어벨트의 도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포드 자동차는 825달러에  출시됐다. 당시 2000달러였던 자동차의 가격에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740분이 걸리던 자동차 조립시간도 93분까지 단축되었다. 가격은 계속 하락했다. 

 

조엘 모키어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헨리 포드는 전형적인 앙트레프레너이다. 그는 사실 발명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아이디어를 취합해서 어는 누구보다 더 저렴하고 나은 차를 만들었다. 

 

래리 슈웨이커트(미국 데이턴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것이 열쇠입니다. 모두에게 접근이 용이한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접근이 용이한 제품이기 때문에 사람을 돕거나 삶이 더 나아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차동차의 대량 생산이라는 혁신에 이어 포드는 또 다른 혁신을 시도했다. 근로자의 최저 임금을 하루 8시간 노동에 일급 5달러로 책정한 것이다. 당시 최저 임금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장용성 (연세대 상경대학 경제학부 교수) 포드사는 당시 업계의 관행에 비해서 훨씬 높은 파격적인 임금을 지불했다. 어느 경제학에서 효율적 임금 가설이라고 부르는데 높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노동자들로 하여금 더 열심히 일하게 만들고, 또 우수한 인력 유치에 큰 도움이 되었다. 생산 공정의 표준화와 더불어 생산 단가를 크게 낮춤으로써 그때까지 사치룸이었던 자동차의 대중화와 보급화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자동차가 대량 생산되면서 상류층뿐만 아니라, 근로자와 농부도 자동차를 소유하는 시대가 열렸다. 미국 전역에 자동차 도로를 만기기 위한 공사가 일어났고, 덕분에 수많은 일자리가 생겼다. 자동차 도로 주변에 주유소와 쇼핑센터들이 생기면서 도시 주변에까지 발전하기 시작했다. 기술 혁신이 인간의 생활 방식을 바꿔 놓은 것이다. 

 

김두얼(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생산체제는 20세 기적인 생산의 완성이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결합은 다은 산업에도 파급되어 모든 산업에서 등장하게 되었다. 헨리 포드 이후에 세상은 바뀌었고,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마크 카슨 (영국 레딩대 경제학과 교수) 슘페터는 앙트레프레너들이 중요한 혁신을 만든다고 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위협적으로 느끼는 그런 혁신을 말한다. 슘페터는 하나의 혁신이 지식수준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혁신의 플랫폼이 되고 또 다른 혁신을 이끌어 낸다고 했다. 이 혁신의 효과가 축적되면서 경제는 성장한다는 것이다. 

 

베서머라는 앙트레프레너로부터 시작된 기술 혁신이 다른 혁신에 영향을 주면서, 한 사회, 한 시대의 패러다임에 영향을 준 것이다.  인류 문명은 앙트레프레너의 혁신, 창조적 파괴의 결과이다. 종이, 인쇄기술, 증기기관, 전화, 전기, 컴퓨터 등 앙트레프레너들의 창조적 파괴가 사회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수세기의 산업사회를 지나 지식사회로 옮겨오면서 혁신의 속도와 폭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고 있다. 어제까지 정상을 지키던 기업도 혁신에 성공에 새로운 기업이 등장하면 그 자리를 내주고 퇴장한다. 앙트레프레너 혁신이 사라진 나라들 역시 후발국에 경제 패권을 내주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21세기 경제 강국의 비밀은 앙트레프레너, 창조적 파괴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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