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대항해시대를 개척했던 포르투갈, 스페인이 경제적 부의 흐름을 이어받지 못하고, 후발 네덜란드에게 경제적 부를 선사하게 된 이유를 상세히 설명을 하고 있다. 경제적 부는 막연히 강력한 정치, 군사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앙트레프레너와 같은 인물의 등장과 동시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영상이 말하는 것은
https://www.youtube.com/watch?v=RCjrriklJqI&list=PL2cXnoEDdx5J2jM_9w2aePKbBh1P8TpFa&index=5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가 세계사 정면에 나타나는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네덜란드 테슬항을 출발해서 동양의 향신료와 부를 싣고 돌아왔다. 17세기 네덜란드는 황금기를 맞이했고, 경제강국이 됐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정치나 군사가 아닌 경제로 강대국이 되는 시대가 열릴 줄, 그리고 자신들이 그 주인공이 되리 나는 사실을.
1602년부터 200년간 활동했던 동인도 회사는 당시 가장 큰 기업이었고,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중요한 창구였습니다. 동인도회사에 대한 자료는 2천5백만 페이지의 방대한 자료가 국립기록보존소(네덜란드 헤이그)에 남아있다.
동인도회사의 암스테르담지부 투자자 명부에는 수천명원 투자자로부터 6천5백만 길더를 모집했다.. 한화로 약 1250억원이 된다. 회계장부 마지막장에 회계장부 하녀 "디호눔 얀스"라는 이름이 있다. 그 위에는 총독의 하녀 "네일트헌 코르넬리스"라는 이름도 보인다. 네덜란드는 막일꾼이 거상이 되고, 그의 아들이 시장이 되는 그런 나라였다.
카를 다비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자유대 역사학과 교수) : 17세기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기회가 훨씬 더 많았다. 부자가 되어 집을 짓고, 자녀을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부자가 되는 것을 고민했고, 동인도라는 주식회사를 만들었습니다. 거래와 투자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상업자본주의 역사가 네덜란들에서 시작된 것이다. 1600년대 어떤 나라가 서민에게, 하녀에게 자본가가 될 기회를 줬을까?
헹크 덴 하이어 (네덜란드 레이덴대 역사학과 교수) 네덜란드는 일반인, 민간인들이 거래할 수 있었고, 그들이 나라를 운영했다. 반면 프랑스, 스페인 등 다른 유럽 국가들은 왕과 상류층이 아주 중요했다. 그래서 민간인은 어떤 것에도 투자하지 못했다.
1576년 11월 4일 네덜란드 안트베르펜에서 스페인 제국 군인들이 그들을 습격한 일이 발생했다. 그들은 보이는 데로 죽이고 약탈했다. 시민들은 맞서 싸웠지만, 총과 대포를 앞세운 군인들에게 역부족이었다. 역사는 이 날을 스페인의 광기로 기록한다. 도대체 무슨 이유였을까?
당시 안트베르펜은 유럽에서 잘 사는 도시였다. 유럽 중북부는 북독일 상인의 발팅 무역이, 남부는 이탈리아 상인의 지중해 무역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무역망이 모이는 곳이 안트베르펜이었다. 아시아의 향신료와 비단, 플랑드르 모직물, 북유럽의 목재와 곡물 등 다양한 상품거래가 이어진 안트베르펜이 공격당한 이유는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였다.
네덜란드와 스페인, 이 두 나라의 운명은 스페인의 광기가 있기 80여년전인 1492년에 결정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막강한 군사력과 무역망을 갖춘 이슬람은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스페인은 그들을 상대로 계속 전쟁을 했고, 마침내 최후의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를 함락시켰다. 스페인은 800여 년 만에 가톨릭으로 통일을 이룬 것이다. 그때가 1492년이었다.
존 엘리엇(영국 옥스퍼드대 역사학과 교수) 그 때는 스페인이 강대국으로서의 국제적 경력을 시작한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그때 이탈리어 상인들 중심으로 동양의 향신료와 사치품을 유럽에 전해졌다. 동양과의 중개무역은 유럽상인들 특히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많은 이득을 안겨다 주었다. 그런데 동서양을 잇는 무역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세계사는 그전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종교적으로 기독교 성지가 이슬람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이고, 경제적으로 아시아로부터 들어오는 수입품들이 가격 폭등할 것이라는 우려가 생긴 것이다. 아시아에 이르는 새 항로를 개척해야겠다는 생각은 여기에서 출발하게 된다. 특히 대서양에 접한 아베리아 반도의 국가들이 이 사업에 적극적이었다.
포르투갈이 제일 먼저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해에 나섰다. 카톨릭으로 통일을 이룬 스페인도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492년 스페인이 권하는 콜럼버스가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골목에 있는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스페인 너머의 새로운 땅,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콘수엘라 바렐라 (스페인 서반아메리카연구대학 교수)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부를 꿈꾸며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본토로 세금을 보내고, 자녀와 친척들을 불러들였다.
스페인은 신대륙의 풍부한 금과 은을 약탈했다. 그리고 원주민의 노동력을 이용해서 농장을 경영하는데 집중했다. 중남미 대부분이 스페인 군대에 의해 정복됐고, 곳곳에 식민도시가 건설됐다.
존 엘리엇(영국 옥스퍼드대 역사학과 교수) 1500년대는 스페인의 영토 확장 시기였다. 멕시코, 페루 등 남아메리카 대부분과 중앙아메리카 일부를 정복했다.
1545년, 스페인의 운명을 좌우할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다. 대규모 은광이 발견된 것이다.
존 엘리엇(영국 옥스퍼드대 역사학과 교수) 스페인은 1545년에 엄청난 발견, 즉 포토시 은광을 발견합니다. 아메리카의 은은 엄청난 가치를 안겨주었다. 이로 인해 16세기의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됩니다.
1504년부터 1560년까지 신대륙에서 스페인으로 유입된 은은 1700만Kg, 전 세계 보유량의 74%에 해당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신대륙으로부터 들어온 엄청난 은으로 무장한 스페인은 유럽은 물론 아메리카 전역을 거침없이 차지해 나갔다.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된 것이다. 당시 스페인은 유럽에서 넘 볼 수 없는 절대 강자였다. 스페인 왕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톨릭을 수호하는 것과 넓은 영토를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었다. 그들의 신념은 끝없는 전쟁으로 이어졌고, 후발 제국의 쇠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존 엘리엇(영국 옥스퍼드대 역사학과 교수) 150년 넘게 스페인에 평화가 있었던 때는 거의 한 해도 없었다. 제국의 운명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 초강대국이 되면 자신이 가진 것을 지켜내야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4_pDRHJUm0&list=PL2cXnoEDdx5J2jM_9w2aePKbBh1P8TpFa&index=5
"나는 이단의 통치자가 되어 하느님의 가호와 신앙에 손상을 입히느니 차라리 국가와 함께 목숨을 버리겠다." 스페인 펠리페 2세
16세기 최정성기를 이끈 펠리페 2세 역시 유럽을 카톨릭으로 재통합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에게도 필하수 없는 선택이었다. 거기에다 선대로부터 막대한 채무를 물려받은 탓에 재임기간 동안 4 차례 파산 선고를 하게 됐다. 그는 스페인이 통치하던 네덜란드에 모든 상거래에 대해 10% 세금 부과를 강압적으로 채택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성상을 파괴하며 스페인에 맞섰습니다. 모든 상거래에 10%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자유로운 무역 활동을 막고, 이윤을 떨어뜨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업이 주요 산업인 네덜란드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분노한 펠리페 2세는 군대를 파견했다. 1567년 1만 명의 스페인 군대가 네덜란드로 진군한다. 피의 법정이라 불리는 특별 법정이 설치됐다. 수천 명의 시민이 처형됐고, 재산도 몰수됐다.
레오 루카센(네덜란드 레이데대 역사학과 교수)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강압적인 중앙집권체제에 반발한 것이다. 그들은 스페인의 군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자신들의 도시 운영에 관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펠리페 2세는 더 많은 세금을 원한 반면 그 대가로 네덜란드의 자치권을 용인하지 않았다.
"누구나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어느 누구도 종교를 이유로 심문받고 난 박해받아서는 안된다" -위트레흐트 동맹(1579)
높은 세금에 반대한 네덜란드는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며 독립전쟁을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 싸움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교한다.
리처드 실라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 교수) 만일 당신이 돈을 걸어야 했다면 스페인이 네덜란드를 이긴다는 데 걸었을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은을 주체하지 못했다. 스페인 사람들에게 은은 축복인 동시에 재앙이었다.
존 엘리엇(영국 옥스퍼드대 역사학과 교수) 스페인에서 들어온 은이 제단이나 촛대 등의 장식에 사용된다. 엘리트 계급의 과시적 소비에 쓰였다. 또한 많은 양의 은이 아시아와 향신료나 비단 등의 수입대금으로 지출되었다.
김두얼(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신대륙의 은이 들어오게 되면서부터 스페인의 물가가 상승하였는데 약 100년 동안 세 배 가까이 물가가 상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로 인해 스페인은 제품 가격이 비싸져서 해외로부터의 경쟁력이 약화되었고, 그로 인해 산업경쟁력이 약화되었다.
게다가, 카톨릭의 종주국으로 자청하던 스페인은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유대인과 이슬람인들을 처형하고 추방했다. 1492년 그라나다 정렴 전후에 10만 명의 유대인을 스페인에서 추방됐고, 1600년대 초반까지 30만 명이 넘는 이슬람인들이 스페인을 떠나야 했다. 그들 중에 상공인들이 다소 포함됐다.
스티븐 핀쿠스 (미국 에일대 역사학과 교수) 이로 인해 스페인은 제조업 분야가 없었습니다. 국내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프랑스나 영국에서 수입되는 제품에 의존해야 했다. 스페인은 16세기말부터 17세기에 걸쳐 심각한 산업의 공동화를 겪었다.
스페인은 영토가 거대한 만큼 분쟁도 끝이지 않았다. 종교와 명분을 위한 전쟁이 계속된 것이다. 어느 순간 아메리카에서 들어오는 은의 양이 줄기 시작했다. 채굴량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황실 수입은 감소했고, 채무는 계속 증가했다.
존 엘리엇(영국 옥스퍼드대 역사학과 교수) 스페인 제국이 쇠락한 첫 번째 이유는 150년에 걸친 전쟁과 지나친 제국확장이다. 스페인은 한정된 자원으로 너무나 많은 전쟁을 했다. 무한해 보이는 자원이지만 무한하지 않는다. 1598년 펠리페 2세가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은 전쟁 비용을 지나치게 소진한다.
스페인은 부족한 전쟁 비용을 외국은행에서 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전쟁으로 상습 채납국이 됐다.
리처드 실라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 교수) 왕이 빚을 안 갚는다는 사실 때문에 대출금리가 높았다. 이것이 더욱 스페인을 악화시켰다. 네덜란드는 스페인보다 나은 금융 시스템이 있었다. 군대에 자금을 댈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자기 무게보다 큰 덩치 펀치를 날릴 수 있었던 거다.
스티븐 핀쿠스 (미국 에일대 역사학과 교수) 스페인은 16, 17세기 유럽의 초강대국이었다. 그런 스페인을 상대로 네덜란드가 독립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역동적인 경제시스템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광기는 계속되는 전쟁과 제조업의 몰락으로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스페인 군인들이 안트베르펜을 약탈한 것이다. 10여 년에 걸쳐, 스페인 군인들의 약탈과 파괴는 지속됐고, 1585년 스페인은 마침내 한트프펜을 점령했다. 1560년 10만이 넘던 인구는 1590년 4만 2천 명으로 줄었다. 스페인에 의해 항구가 봉쇄되어 무역활동이 어려워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안트베르펜을 떠나게 된 것이다.
스페인의 광기를 피해, 안트베르펜을 떠난 사람들이 향한 곳은 암스테르담이다. 당시 암스테리담은 일자리가 넘쳤고, 새로운 사업 기회가 많아 많은 이민자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오스카 헬러블러 (네덜란다 위트레흐 트대 역사학과 교수) 네덜란드의 지역정부들은 모두를 환영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 와서 무역하세요. 여러분이 누군지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포르투갈계, 유대인이든 가톨릭교도인 든 루터교이든 우리는 당신을 내쫓지 않는다."
레오 루카센(네덜란드 레이데대 역사학과 교수) 17세기 초기 암스테르담의 인구 10명 중 4명이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당시 암스테르담을 다스렸던 책임자들은 암스테르담을 개방할 수 있는 한 개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며 그것이 가장 경쟁력 있는 상인들과 상인네트워크를 도시로 끌어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의도적으로 이익에 이끌린 정책이었다고 보면 된다.
사람들만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했던 것이 아니다. 자본과 상인 무역망도 함께 옮겨왔다. 안트베르펜의 무역망이 암스테르담과 합쳐지면서 네덜란드는 경제강국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기회를 갖게되었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경제수도였다. 인력과 자본, 상품이 모이면서 경제의 중심직 되었다. 암스테르담에 있으면 유럽은 물론 전 세계의 시장의 흐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얀 빌럼 펠루언캄프 (네덜란드 호로닝언대 역사학과 교수) 주요 거래 정보 중 하나는 암스테르담의 유명한 상품가격표였다. 상풍들의 가격이 매일, 매주 제공되었다. 그래서 모든 상인들이 '이 상품은 이날 암스테르담 가격이 이렇구나"라고 알 수 있었다. 이는 사업을 결정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BBSoEDgN4k&list=PL2cXnoEDdx5J2jM_9w2aePKbBh1P8TpFa&index=6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이윤이 많은 사업은 향신료 중개무역이었다. 당시 유럽으로 가는 항로는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에 수입된 향신료는 안트베리펜에서 유럽 각 지역으로 재분배되었다. 근데 안트베르펜의 몰락으로 모든 상황이 변했습니다.
로버트 파트테시우스 (네덜란드 레이덴대 고고학과 교수)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전쟁을 하고 있었고, 포르투갈은 스페인 편이었다. 그래서 네덜란드는 거래상에서 제외됐던 것이다. 당시 안트베르펜에서 쫓겨 온 사업가들은 향신료 무역에 대한 정보와 자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네덜란드는 장거리 무역을 도전하기로 했다. 성공은 고사하고, 살아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었지만 위험이 크면 이윤도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버트 파트테시우스 (네덜란드 레이덴대 고고학과 교수) 한 번도 가보지 않는 곳으로의 항해였지만, 부를 가져다줄 수도 있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기꺼이 참여한 것이다.
1595년 300~400톤급 배 3척, 50톤급 요트 1척, 선원 240명이 출발했다. 희망봉을 지나 바타비아에서 향신료를 싣고 돌아오는데 꼬박 30개월이 걸렸다. 3척의 배에 겨우 87명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투자 비용도 겨우 충당한 정도였다. 장거리 무역의 가능성을 확인한 귀한 경험이었다. 본격적인 장거리 해상 무역 시대가 열렸고, 투자열기가 퍼졌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나라 전체 비율을 줄었다. 그러자 네덜란드 전국 의회에서 전군 선단을 통합해 하나의 화사를 만들기로 했다.
1602년 동인도회사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총 46개 조항으로 구성된 동인도회사 인허장에는 회사의 항해독점권을 인정하는 부분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동인도회사가 국가를 대신해 아시아에서 주장한 권리도 공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로버트 파트테시우스 (네덜란드 레이덴대 고고학과 교수) "회사를 하나로 통합하면 주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 국가처럼 행동할 수 있도록 독립적인 권리와 무리글 제공하겠다. 대신 유럽 밖에서는 정부의 군대가 되어달라"라고 말했다.
동인도회사는 평범한 무역회사가 아니었다. 네덜란드 국민이 대표하는 의회에서 만든 기업으로 외국에선 네덜란들 그 자체였다. 동양으로 가는 장거리 무역은 유럽 내 다른 무역보다 이윤이 큰 만큼 초기 자본도 더 많이 필요했다. 당시 규모가 큰 사업은 여러 사람이 동업형태로 많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상인으로 부터 시작한 꼼빠리아가 대표적이다. 오늘날로는 합자회사에 해당합니다.
김두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중세 이탈리아의 꼼빠니아는 여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모으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돈을 투자하고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능력을 투자함으로써 새로운 사업을 하는 방식으로 활용이 되었는데 이것이 중세 이탈리아 해상무역의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오스카 헬러블러 (네덜란다 위트레흐트대 역사학과 교수) 한편 동인도회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동참을 허용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소액을 투자받아 항해에 필요한 자본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현명한 방법이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누구나 동인도회사에 투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총동의 하녀도 장갑 제작자도 대상인도 동인도회사의 주주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의 광기를 피해 안트베르펜에서 온 상인들도 기꺼이 투자했다.
헹크 덴 하이어 (네덜란드 레이덴대 역사학과 교수) 주식거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주 중요하다. 큰 회사를 시작하고, 장기투자를 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 보통 일반인들에겐 그렇게 많은 투자금이 없다. 그래서 주주들로부터 자본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그 자본을 기업에 투자하고 장기적으로 수익을 내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운영방식도 특별했다. 주식의 만기는 21으로 원한다고 해서 바로 찾을 수 없었다.
클레이 레스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경제사학과 교수) 이전에 설립된 회사들은 한 번이나 두 번의 항해를 하고 나면 자본을 나누고 회사가 분리돼 새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헹크 덴 하이어 (네덜란드 레이덴대 역사학과 교수) 사람들은 단기투자에 익수했다. 자본은 보통 배의 항해기간 1년 혹은 2년간 투자했다. 21년 동안 투자하는 건 매우 이례적이었다.
유럽 평균 수명이 30대에 머물던 시절, 21년 동안 투자금을 찾을 수 없다는 건 무리한 조건이었다. 그래서 동인도회사는 회계담당자를 통해 주식을 사고 팔고할 수 있게 했다.
헹크 덴 하이어 (네덜란드 레이덴대 역사학과 교수) 동인도회사 주식이 모두 판매된 지 1개월 후, 사람들은 동인도회사 주식을 살 수 없었다. 그러자 주식보유자들이 웃돈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주식을 팔고 싶어 했다. 주식가격이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간의 거래가 가능했기 때문에, 주식 소유자는 바뀌어도 동인도회사 전체 자본은 유지됐다. 그 자본으로 회사는 계속 운영될 수 있었다. 혹시 배가 침몰하거나 거래상에 손해를 보더라도, 투자자들은 그 모든 것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이윤 배당이 투자액에 비례하는 만큼, 책임도 투자액만큼 감당하면 되었다.
헹크 덴 하이어 (네덜란드 레이덴대 역사학과 교수) 그것을 우리는 유한책임이라고 부른다. 투자자는 회사에 수백 길더를 투자할 수 있지만 회사에 문제가 발생해도 책임지지 않는다. 투자자는 투자한 금액을 잃을 뿐이다.
처음엔 동회도회사 직원을 통해 주식 거래를 했지만, 아예 주식을 사고 파는 주식 거래소가 생겼다. 상거래와 금융거래만으로 큰 이윤을 기대할 수 있는 상업자본시대가 열린 것이다 바로 네덜란드에서.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무역과 해운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금융기관의 발전이 뒤받침해야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주식거래소가 나타나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상품과 기업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고 그걸 바탕으로 거래가 이우어졌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금융상품뿐만 아니라 파생상품까지도 들어오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해서 상업자본주의는 탄탄한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헹크 덴 하이어 (네덜란드 레이덴대 역사학과 교수) 주식시장은 미국의 월스트리트,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프랑스 파리, 영국의 런던 등 전 세계로 확산됐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운영방법 자체가 달랐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1회 항해 후에 이윤과 원금을 분배하고 바로 해산했다. 한 차례의 자본만 발생할 뿐, 축적될 수 없는 구조였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원금과 이윤을 분배하지 않고, 다음 항해에 자본으로 투자했다. 항해를 계속할수록 자본규모는 그 만큼 커졌다.
로버트 파르테시우스 (네덜란드 레이덴대 고고학과 교수) 영국 회사들은 소규모로 화물로 가지고 돌아와 판매하고 해산하는 일회성 무역의 형태를 띠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운영되었지만, 각각의 회사들은 독립적으로 움직였다.
클레이 레스허(네덜란드 암스테리담대 경제사학과 교수) 네덜란드는 벌어들인 수익을 지속적으로 무역에 재투자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동인도회사가 출범하고, 전세계의 상품과 자본이 쏟아져 들어왔다. 당시 유럽을 항해하던 3천여척의 선박 가운데 절반이상이 네덜란드의 선박일 정도다. 1700년 네덜란드의 GDP는 선두였다. 당시 유럽의 잘 사는 나라들은 비등비등한 상황이지만, 네덜란드는 독보적이었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역사적으로 합자회사나 주식회사가 네덜란드에서 처음 시도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식회사가 대표적인 기업에 적용이 되고, 개별기업을 넘어 주식시장에서 거래가 된 것은 네덜란드가 처음이다. 또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다수의 국민들이 투자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도 네덜란드에서였다. 그래서 유한책임제도를 도입하고 투자가 개방됐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제도적 혁신을 이룬 네더란드는 앙트레프레너의 국가라고 볼 수가 있다.
스페인이라는 거대 제국으로부터 독립전쟁이라는 것은 네덜란드의 시련이었다. 네덜란드는 전쟁중에 동인도회사라는 유한책임주식회사를 만들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상업자본주의를 완성했다. 마침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스티븐 핀쿠스 (미국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 17세기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거의 모든 동아시아의 상품들이 네덜란드 선박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역동적인 경제였다. 경제사에서 언급되는 네덜란드의 기적은 당시의 경제가 얼마나 역동적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척박한 환경을 감수하고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들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하기 위해 항해를 나섰고, 유한책임주식회사 동인도회사를 통해서 경제의 새로운 장을 만들었다. 역사속에 이름도 나와있지 않는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네덜란드를 만든 앙트레프레너라고 생각한다. 17세기 이들이 있어 네더란드는 황금기를 맞았고, 경제강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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